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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저승갈때 뭘 가지고 가지] 석용산 스님 에세이 7가지 이야기 본문
◑ 이야기 하나
허목은 이조 숙종 때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부와 명예에다가 아름답고 총명한 첩까지 두고 사는 복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인간사 무상한 것이어서, 허목도 불행의 그림자를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늦게 퇴청하여 돌아와 보니, 반겨 주어야 할 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요. 낮에 어느 숯장사를 따라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계집종의 얘기였습니다. 그녀가 왜 나갔으며, 왜 자기 곁을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몇 날을 기다리다 결국 사직서를 내고 여인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매게 되었지요. 삼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서야, 안동 땅 어느 마을 숯가마 앞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나 만나기는 했지만 데리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설득과 애원을 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지요. 마지막으로 자기를 버린 이유라도 알고자 했으나, 그저 인연이 다했다는 말밖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어쩔 도리가 없었답니다.
허탈과 고통, 배신감과 의혹 속에 발길은 친구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절로 향했고, 며칠 동안을 두문불출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지요. 결국은 그 이해되지 않는 여인의 마음을 의심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화두를 이루었고, 그 화두는 결국 허목을 견성오도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지요.
인연을 설명하자면 자신은 전생의 수도자였고, 그 여인은 수도인의 몸에서 피를 빨던 벼룩이었는데, 벼룩이 너무 커져서 몸속에 눌려 죽을까봐, 산길 어느 바위에 벼룩을 놓아 주었으며, 그 벼룩은 바위 가까이 잠을 자던 산돼지의 몸에 떨어져서 남은 생을 마치게 되었는데, 그 산돼지가 바로 숯장사라는 것. 그들이 금생에 다시 인연이 되어서 전생에 벼룩이었던 첩이 처음에는 자신에게 봉사하였고 나머지 생은 숯장사에게 몸을 맡긴 전생의 사연을, 그는 훤히 알게 된 것이죠.
◑ 이야기 둘
양무제는 초기에 많은 불사와 선정을 베풀어서 치적을 쌓았는데, 말년에 실정을 하여 가장 아끼고 믿던 신하의 손에 의해 바위 굴 속에 갇히게 되지요. 처음엔 저주와 욕설로 시간을 보냈지만 불심천자라 일컬어졌던 그였기에 신심이 돈발하여 바위굴을 법당삼아 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활연대오를 깨치게 되어서 시 한수를 남기게 되었지요.
아들들에게도 원수 갚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좀 더 상술한다면, 전생에 양무제가 포수였을 때, 산 위에 올라가 바위굴을 발견하고, 바위 굴 속에 부처님 한 분도 발견하게 되었지요. 산에 오를 적마다 꽃을 불전에 올리면서 살생하는 포수가 싫으니, 다음 생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되게 해 달라고 기원을 하곤 했지요. 어느 날 또 가보니 부처님은 거룩한 모습 그대로인데, 공양 올린 꽃이 손에서 떨어져 있고 대신 과일이 올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시 과일을 내리고 꽃을 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다음에 올라가 보니 역시 꽃은 버려져 있고 다른 과일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게 되자, 슬며시 화가 난 포수는 굴을 지키게 되었답니다. 얼마 후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나 꽃을 버리고, 과일을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포수는 앞뒤 생각없이 굴문을 돌로 막아 버리고 내려와 버렸지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얼마를 지났는데, 꿈속에 원숭이 울음소리를 듣게 되고 지난 일이 생각나서 가 보았더니, 이미 원숭이는 굶어 죽고 말았지요.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포수가 꽃을 올리며 기원하는 모습을 뒤에서 보게 되고 자기도 역시 과일을 올리면서 저런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런 사람과 함께 거룩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공덕으로 포수와 원숭이는 황제와 신하라는 인연으로 금생에 태어났고, 서로 얽힌 인과응보로 포수였던 황제는 원숭이였던 신하에게 굴속에 갇히게 된 것이지요.
◑ 이야기 셋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 윤웅열 대감의 환생기를 들어보며, 속된 시간을 넘어 성스러운 시간 여행을 해보았으면 한다.
윤대감은 1840년 생으로 조선시대 무신이며, 본관은 해평, 아산 출신으로 1856년 무과에 급제하고 남양부사 등을 지내며, 1880년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고, 형조판서와 군부대신을 지낸 사람이다. 대원군 당시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대원군이 중국 귀양길에 오르니, 역시 윤대감도 완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무인고도와 다름없는 작은 섬에서의 나날은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케 하고, 전생에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이런 고초를 당하는가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시름을 달래는데 시종이 달려와서 이른다.
「대감마님, 용한 점쟁이가 있답니다. 답답도 하실테니 심심풀이로 한 번 보시지요?」
「이놈아! 제 점도 못 치는 세상, 남의 점을 어찌 친단 말이냐?」
「대감마님! 제 밑은 못 봐도 남의 밑은 볼 수도 안 있겠습니까? 심심풀이로 한 번 가보십시오.」
「이놈아! 아무리 그렇지만 양반 체면에 무당집을 찾아가란 말이냐? 가서 불러 오려므나.」
한참 있다 돌아온 시종이 말했다.
「대감마님! 아직도 대감으로 착각하는 대감마님의 점은 억만금을 줘도 못 보겠답니다.」
「어흠!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래 가보자꾸나.」
점쟁이는 겨우 열여섯의 어린 처녀였는데, 동자귀신이 붙어 남의 운명을 용케 알아맞춘다는 것이다.
흘낏 대감을 쳐다본 처녀는 말했다.
「대감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앞으로 이 주일만 지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대감의 귀가 확 트였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위로의 말로 들어두자 생각하면서도, 신부들을 따라서 일본으로 유학을 간 자식이 궁금했으므로 자식의 소식을 물었다.
「지금 미국에 가 있습니다. 청국 색시하고 약혼하였으니 내년 가을이면 만나 보게 될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사람이, 미국에 갔을 리도 없고, 미국에 있는 사람이 청국 색시와 약혼했을 리는 더욱 없었다.
어린처녀에게 허황된 것을 묻고 듣는 자신이 처량하여,
「그럼 난 전생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고생을 하나?」
한탄조로 말을 던졌더니, 청산유수로 대답을 한다.
「대감님! 대감마님은 전생에 석왕사에서 「해파」라는 스님으로 승려노릇을 하였는데, 형님되시는 분은 스님노릇을 잘못하여 지금은 강원도 홍천에서 이경운이란 이름으로 주막거리에서 술장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두 손이 모두 조막손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감은 수행을 잘하신 과보로, 중국에서 재상노릇을 하시다가 우리나라에 태어나 복을 누리시는 겁니다. 고생도 잠깐이니 참으십시오. 수행 잘하신 공덕으로 자손들도 모두 창성하고 부귀영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석왕사에 가보면 내 전생 일을 알겠구나.」
「아다마답니까! 대감마님 전신인 해파 스님 사리탑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꿈 같은 이야기였지만, 막연한 기대 속에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십사 일만에 귀양이 풀린다는 해배문서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한양에 올라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세월이 흘러 일 년이 지났다. 그해 가을 홍콩에서 전보가 왔는데, 아들이 결혼식을 올리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내외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자식 내외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제일 먼저 석왕사를 찾게 된다. 1903년 대감의 행차에, 석왕사의 주지 설화 스님을 비롯하여 대중들이 깜짝 놀란다. 생각지도 않은 높으신 분이 한양에서 내려왔으니.
「어인 일이신지요?」
「내집에 내가 오는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주지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수행했던 곳을 일일이 둘러보며 감회에 잠기었다.
자신의 전신인 해파 스님의 사리탑도 찾고, 금 수백 냥을 내려 석왕사를 중건케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바로 유대력이라는 사람을 시켜, 강원도 홍천에 가서 전생에 형님이었던 이경운을 찾아오게 한다.
버선발로 맞이하며, 손을 잡고 형님이라 부르는 높은 대감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조막손 이경운은 그저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형님 나를 모르시겠습니까? 전생에 주지스님까지 하신 분이 그렇게도 깜깜하십니까?」
윤대감은 이경운에게 자신과의 전생 인연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강원부사 이경영에게 명을 내려, 전생의 형님인 이경운을 편안히 모시도록 시킨다.
「형님 부디 염불 많이 하십시오.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서 또다시 만나 함께 수행하는 형제가 됩시다.」
윤대감은 다시 완도로 향해 간다. 한 마디도 틀리지 않은 그 영특한 처녀무당을 만나 인사도 하고, 삼 년 동안 고생했던 유배지를 자식들에게도 보여 줄 겸해서였다. 처녀무당에게 소원을 물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 주겠다 하니,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에게 붙은 동자귀신을 떼어 주는 일이란다.
동자귀신이 있어야 영험한 무당 노릇을 할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남의 운명을 점쳐 준들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이가 십팔 세가 넘었는데도, 자신을 자신 마음대로 못하고 동자귀신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니, 죽는 것보다 괴롭고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 덕 높으신 스님을 모셔 사십구 일 천도제와 백 일 동안의 지장기도를 올려 주면, 동자귀신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지장보살님 가피를 입으신 도력 있으신 스님이셔야 합니다.」
「오냐! 내 너를 위해 무엇을 못하겠느냐.」
결국 처녀무당은 귀신을 떼고 윤대감이 마련해 준 집(전 은석초등학교 뒷터)에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 이야기 넷
남이는 이조 세종 때의 무신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우대장으로 이시애란을 평정하고 이십팔 세 때 병조판서를 지낸 사람이다.
이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판서를 지냈으며 문무에 뛰어났던 그였으나, 많은 살생을 한 인과로 자신도 유자광의 모함에 주살을 당하고 만다.
그런데 남이는 날 때부터 글을 알고 전생을 아는 신동으로 알려졌었다.
남이의 전생담을 들어보며, 코앞밖에 볼 줄 모르고 현실만을 생각하는데 길들여진 우리들의 사고 작용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남이의 전전생(前前生)은 전라도 영광 지방의 글 읽는 선비로 성은 송씨였다 한다.
잠잘 때도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그를, 책에 미친 송서방이라 불렀으나, 사십이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었고, 아내가 남의 집 삯바느질과 품팔이로 끼니를 이어 갔다.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과거에 급제하기를 기다리는 아내는 정성껏 뒷바라지를 했다.
어느 날도 일 년 동안 품팔이와 삯바느질로 모은 나락들을 마당에 널어놓고 품을 팔러 가며, 혹시 비가 올지 모르니 빗낱이 던지거든 나락들을 거둬 달라 부탁을 하고 간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마당에 널어놓았던 벼들은 순식간에 또랑으로 씻겨 내려가고 말끔하게 되었는데도, 송서방은 그저 글만 읽고 있었다.
바느질품을 팔면서도 억수 같은 소낙비에, 마당의 나락이 어찌 되지 않았을까 쫄밋쫄밋 마음 조리다가,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나락이 한 톨도 없는지라 안심을 하고, 송서방에게 나락을 어디다 치웠느냐 물었다.
그러자 송서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나락을? 나락이 어디 있는데?」
참으로 기가 찬 노릇이었다.
「저런 인간을 서방이라고 믿고 사는 내가 미친년이다. 무슨 희망을 안고 살 것인가! 떠나자.」
결국 송서방의 아낙은 떠나고 말았다. 그것도 모른 송서방은 그저 책만 읽고 있었으며, 저녁이 되어도 아침이 되어도, 아내도 먹을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생각도 잠깐이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니, 창자가 마르고 오장육부가 말라 굶어 죽고 말았다.
인간은 죽었어도 죽은 줄 모르기에 깨닫지 못하면, 하루에도 만 번 죽고 만 번 사는 것이다.
얼마 있자니 동리 사람들이 모여 들어 불쌍한 송서방이 죽었다고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평소 좋아하던 찹쌀떡을 올려놓는데, 정신없이 먹다 보니 바싹 마른 자기 몸뚱이를 새끼줄로 꽁꽁 묶어 남산에 가져다 묻고 자기가 보던 책도 다들 나누어 갖는데, 별로 서운한 생각도 없고, 찹쌀떡이나 한 번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장터로 나가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찹쌀떡이 또 눈에 띄었다. 외상으로 몇 개만 먹자고 얘기하는데도 못들은 척한다. 「애라! 먹고 보자」하며 실컷 먹고, 다음에 갚겠다고 인사를 하였으나,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 다니며 먹고 싶은 걸 먹었지만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아내 생각이 나서 처가가 있는 충청도 땅을 향해 길을 떴다. 어느만큼 가다 보니 잔치집이 있었다. 출출하기도 하여 들러 보았더니, 회갑연을 하는데 진수성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먹어도 시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경험한 송서방은,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고, 고방에 가서 잘 익은 밀주까지 한 바가지를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올라, 어느 방엔가로 들어가 잠을 자게 됐다. 쏴-아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둘러보니, 웬 예쁜 처녀가 얇은 속옷만 걸치고 요강에 쉬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풍만한 몸매와 허연 엉덩이가 송서방의 빠진 넋을 또 빼놓고 말았으니, 바로 곁에 누워 다시 새근새근 잠을 자는 처녀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라도 걸어 보자」라고 생각하며 처녀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뜬 처녀는 그만, 꽥! 소리를 지르며 벌러덩 까무러치고 마니, 제풀에 놀란 송서방은 방귀퉁이에 숨어, 가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옆방에 자던 부모들이 뛰어와 까무러친 딸을 깨우는데, 깨어난 처녀는 구석의 송서방을 보고 또 기절하고 만다. 문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끌려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송서방이 보이지 않으나 송서방 귀신의 애착이 붙은 처녀의 눈에는 송서방이 보이는 것이었으니, 무당불러 굿을 하고 별짓을 다하였으나 백약이 무익하였다.
하루는 스님 세 분이 오셔서 경을 읽으시는데, 송서방의 불안스럽던 마음들이 편안해지며 자신의 처신이 부끄러워지고 글줄께나 읽고 수양을 쌓았다는 선비가 할 짓이 아님을 깨닫게 되니, 부끄럽기 한이 없었다.
스님들께서 김서방, 박서방, 나중에는 송서방 하고 부르시며 「애착을 끊어라! 무엇을 애착하고 무엇을 회한한단 말이냐? 아무것도 애착할 것이 없느니라. 너는 이미 세상인연 다하여서 죽음에 이르렀으니, 그동안 살았던 인생살이 한 판 꿈이었음을 깨달아라. 너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님을 깨달아라. 너를 버티던 뼈대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갔고, 너를 움직이던 기운도 한 가닥 바람으로 돌아갔으며, 네 가슴 오르내리던 피와 물은 한 줌 물기로 들어갔고, 네 가슴 따뜻이 데우던 온기 역시 화기로 돌아갔다. 부디 미망과 애착에서 벗어나서 네 갈 곳으로 가거라. 무릇 모양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고 마는 헛된 모양이다. 그 모양이 영원하지 않은 이치를 알면 스스로 자유로워지리라!」
스님의 간절하신 법문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송서방은 그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길을 떴다. 멀리 경기도 여주 땅에 도착을 했는데 또 그놈의 떡 생각이 난다. 마침 어디선가 떡 냄새가 바람에 실려와 따라가 보니, 젊은 아낙이 장독대에 시루떡을 올려놓고 두 손 모아 빌고 있었다.
「칠성님! 그저 사내자식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애지중지 잘 키워 나라의 동량이 되게 하고 이 집 가문을 잇게 하겠습니다, 칠성님!」
가만히 듣고 보니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지쳤고, 한곳에 정착하려면 이곳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집에 태어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자비한 여인이여! 내 그대 자식 노릇을 하리다」라고 합장을 하고 두 내외 자는 품안으로 들게 되었다.
그로부터 아낙은 태기가 있어 열 달만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는다. 나면서부터 울음이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귀염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세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아버지가 문지방에다 입춘대길이라는 부적을 써서 붙이는데, 누워 있던 아이(송서방)가 보니 자주 대하던 글이라 「입춘대길이로다」하고 큰 소리를 내어 읽으니 아버지가 기겁을 하며 <이거 큰일이군. 왕자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자가 천재이면 왕손을 꺾고 역적이 된다 하여 삼족을 멸한다는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뭐라고 귓속말을 하더니 옆에 있던 큰 멧돌과 다다미 돌을 가슴에 올려 놓고, 이불을 뒤집어씌우니 아이는 그만 죽고 만다.
아이(송서방)는 다시 정처없이 길을 뜨며, 생각하기를, 이왕에 인도환생활 거라면 아버지가 대심장부인 큰 대가집에 태어나리라. 그리고 아는 체 한 것이 병이니 절대 아는 척도 하지 말며 말도 않는 벙어리가 되리라 결심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간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자식 점지해 달라고 떡해 놓고 비는 의선군 휘의 집에 탁대하게 된다. 의선군 댁에선 옥동자를 보게 되니 경사가 났는데, 문제는 아이가 울지를 않는 것이다.
이목이 훤출하고 기골이 강건하여 아무 이상이 없지만, 아이가 일곱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니 식구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하루는 의선군이 친구들과 모여 시회(詩會)를 하는데 글이 막혀, 잠깐 필묵을 놓고 바람을 쏘이러 나간 사이, 아버지 시문을 그럴듯하게 써놓고 시치미를 떼었다. 바람 쏘이고 들어온 의선군은 깜짝 놀란다.
막히어 이어지지 않던 시가 명문이 되어 있지 아니한가! 친구들이 돌아간 뒤 식구들을 불러 누가 했는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며 그 방에는 남이밖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길에 벌벌 떨며, 전생에도 아는 척하다 죽게 됐는데 이번에도 또 아는 체하다 죽는가 보구나, 생각하고 이실직고를 하게 된다.
남이는 전생 송서방 시대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남김없이 얘기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에게 용서받은 남이는, 총명을 발휘하여 십칠 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젊은 나이로 일등공신 의산군에 봉해지며 병조판서에 이르나, 이십팔 세의 짧은 나이로 참수를 당한다.
일설에는 전쟁터로 출정하는 날 아침에 군대 앞을 젊은 여인이 지나갔다 해서 그 여인의 목을 쳐 죽이니, 그 혼이 원귀되어 남이를 죽게 했다고 전해진다.
백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지 말고, 한 사람과 원수지지 말라는 선현의 말씀을 되새겨 보며, 어제를 생각하듯 과거를 생각해 보며, 과거를 생각하듯 전생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일을 생각하듯 미래를 설계해 보고 미래를 생각하듯 내생을 상상해 보는 사고의 여행, 틀에 갇힌 세상에서 상상의 나래를 한 번쯤 활짝 피워 삼생을 꿰뚫은 대 자유인들이 되어 봤으면 한다.
◑ 이야기 다섯
어떤 농부가 시장에서 암소 한 마리를 사오다가 자신도 목이 마르고 소도 물을 먹일 겸 냇가로 가서 물을 먹는데, 소가 말을 잘 듣지 않자 궁둥이를 걷어차게 되었다.
이 소도 화가 났던지 뒷발로 주인의 낭심을 차서 즉사하게 만든다. 이 소식을 접한 죽은 사람의 아들들은 소를 잡아 갈기갈기 찢어 여러 사람에게 팔아 버린다.
이웃 동리에 사는 사람이 소머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가던 도중, 정자나무 가지에다 소머리를 걸어 놓고 그 아래 누워 잠깐 잠이 들었는데, 걸어 놓은 소머리가 떨어져 자는 사람 목에 뿔이 꽂히게 되니, 소리없이 죽고 만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고 역시 죽은 이의 아들은, 소머리를 가져다가 가마솥에 넣고 푹푹 삼기 시작했다. 소에 대한 분풀이였겠지만, 아궁이에 장작을 터지도록 쑤셔 놓고, 아내와 밭일을 하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잠재워 놓은 두 살짜리 아들이 안 보였다. 이곳저곳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걸음도 못 걷는 어린아이가 멀리 갈 수는 없을 터이고, 집히는 데가 있어 가마솥을 열어 보니 소머리와 함께 그만 삶아지고 있었다. 잠에서 깬 어린아이가 엉금엉금 기어가서 부엌과 연결된 밀창문을 열고 떨어지다 보니, 걸쳐서 덮어 놓은 나무판자 뚜껑이 뒤집어지며 솥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다.
아이의 부모와 동리 사람들은 소 한 마리가 세 사람을 죽였으니,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삼생(전생, 금생, 내생)의 인과를 훤히 통하여 아는 현자에게 묻게 된다.
현자는 조용히 말을 들려준다. 우주법계의 생성 변화나, 얽혀 돌아가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한 현상이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
나는 새가 기류를 탈 줄 알기에 수만 리를 날고 물고기가 물살을 가를 줄 알기에 몇 천 리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인간이 인연의 도리를 안다면 순리대로 사는 세상이 되겠지만 순리를 모르기에 이번과 같은 일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리라.
하루살이는 하루가 전 생애이며 메뚜기는 한철이 모두라고 착각을 하듯, 우리 또한 칠팔십 년이 우리의 전 인생인 줄 착각하나 그렇지가 않다. 암소 한 마리가 세 사람을 죽인, 이 인연도 금생에 일어난 우연의 일이 아닌 것이다.
전전(前前) 수십 생 전에 암소는 주막에서 음식을 파는 노파였고, 죽은 세 사람은 장사를 하고 다니는 장똘뱅이들이었다. 숙박비를 후하게 치르겠다며 며칠을 묵은 세 사람은, 먹고 마신 값은 고사하고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도망치고 만다. 뒤늦게 알고 쫓아가서 값을 요구했으나, 세 젊은 사람들은 노파를 때려죽이고 말았다.
노파는 죽어 가며 저주하기를,
「이놈들! 내가 힘이 없어 너희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만, 어느 생엔가 기운 센 축생이 되어서라도 이 원수를 갚겠다」고 악을 쓰며 죽어 갔던 것이다.
그 인연이 금생에 암소와 세 사람으로 태어나,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모두 내가 지어 내가 받은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 이야기 여섯
인도에 한 장자의 외동딸이 있었는데 가정도 부유하고 인물도 뛰어났다. 모습이 연꽃과 같이 아름답다 하여 연화색(蓮花色)이라 불렀다. 그녀는 일찍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두 부부는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다.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나 행복은 불행의 그림자요 불행은 행복의 그림자라는 말처럼, 연화색의 집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웠으니, 일찍 젊어 홀로된 친정어머니가 그만 연화색의 남편과 눈이 맞아 정을 통하게 된 것이다.
타이르고 엄포도 놓았으나 막무가내였고, 당연한 일인 양 살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딸을 두 사람에게 집어 던지고, 집을 나와 정처 없이 흘러가게 된다. 옷이 찢어지고 발이 부르트고, 반미치광이가 된 연화색은 밥을 얻어먹으러 어느 집을 들리게 된다.
비록 거렁뱅이 모습이었지만 타고난 재색은 감추어지지 않았던지, 그 집 주인의 눈에 띄게 되고 홀아비로 살던 그 집 주인과 살게 되는 인연을 맺는다. 연화색이 들어온 뒤부터 가세가 불어, 연화색은 더욱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명예와 돈이 생기다 보니 남자의 마음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도 갖고 싶었고 처첩도 거느리고 싶어졌다. 장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 처녀 아이를 첩으로 사오게 되지만, 연화색은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딸 같은 첩과 함께 잘 지내게 된다.
어느 날 첩의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에 흉이 있는 것을 보고, 무슨 흉인가 물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다가 나를 던지는 바람에 머리가 깨졌답니다.」
「그럼 어머니 아버지는 누구인고?」
「부끄럽지만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눈 맞아 살게 되니,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잘은 모르지만, 어머니가 연꽃같이 예뻐 연화색이라 불렀답니다.」
「이럴 수가!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이냐? 첫 남편은 어머니에게 빼앗기고 두 번째 남편은 딸에게 빼앗겼으니…….」
연화색은 그대로 뛰쳐나가 미친 듯이 달리고 달리며 발광하다가 나무에 목을 매게 된다.
차라리 업으로 뭉쳐진 몸 덩어리, 목숨을 끊는 것이 복이라 생각했으나, 죽음 역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또한 인생살이임을 어쩌랴!
나무를 하던 나무꾼에게 발견되어 구출되게 된다.
「여인이여! 죽는다고 인생이 해결될 것 같으면, 죽는 사람이 천지일 것이요. 전생에 진 빚이라면 갚고 갚아야 할 일이지, 죽으면 또 한 빚이 아니요. 사는 데까지 살며 진 빚을 다 갚고 가시오. 나 역시 삼 년 전에 나무꾼 아낙이 싫다며 핏덩이를 놔두고, 도시 사내와 눈 맞아 달아난 아낙을 가졌던 사람이오. 함께 의지하며 살다 갑시다.」
동병상련! 인연은 인연을 부르는 것이니, 서로 동정하게 된 두 사람은 또 새로운 남편이 되고 아낙이 된다. 사는 것은 빈곤하였으나 착한 사내의 마음 씀씀이와 남의 자식이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며 수 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어느덧 아이가 장성하여 신부감을 고르게 되었는데, 참한 규수감을 남편이 구했다고 자랑을 하며, 자신과 너무 닮아 좋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와 닮았다? 나와 닮았다……?
「혹시 그 아이 아버지가 장사꾼이고 그 아이 어머니는 나이가 어리지 않소?」
「옛날에는 모르지만 지금은 장사꾼이 아니라오. 그런데 며느리감 어머니는 당신과 너무 많이 닮았고.」
그녀는 집히는 바가 있었으나, 설마하니, 운명의 장난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그럴 리야 있으랴고 생각했다. 딸의 딸과 아들이 결혼하면 친딸과는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고개를 내두르며 잔치 준비를 묵묵히 한다. 얼마 후 며느리감과 상객이 들어오는데, 뒤에 따라온 사람은 자기의 전 남편(두번째)이 아닌가! 가마에서 나오는 처녀는, 딸의 딸! 바로 손녀였으니! 그만 정신없이 집을 뛰쳐나와 산 아래에 몸을 던지고 만다. 얼마가 지났으며,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죽다니 웬 말이요, 이것도 인연이며, 내가 살려준 목숨이니 나와 함께 삽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연화색의 자태는 변함없이 아름다웠으니, 그 또한 업이 아닐런가! 그녀는 거지뿐만 아니라 누구든 돈을 내고 몸을 요구하면, 몸을 주는 창녀가 되고 만다. 워낙 뛰어난 용모인지라 그 명성이 장안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다.
어느 날도 사내들과 산속에서 화전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데, 조용히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신다. 함께 놀던 사내들이 연화색에게 저 스님을 유혹하면 천 냥을 주겠다고 한다. 스님 앞에 간 연화색은 갖은 교태를 다 부렸으나, 스님은 자상히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인이여! 여인의 모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몇 십 년을 갈무리 못 하며, 뼈대가 아무리 강건해도 백 년을 버티지 못함을 잘 알지 않은가! 아름다운 눈과 잎, 코와 귀 아홉 구멍에선 더러운 물이 흐르고, 살이 썩은 해골에는 구더기가 고이는 것을, 그대 역시 익히 보아 오지 않았던가.」
「스님이시여! 저같이 어리석고 천한 운명의 여인은 어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여인이여! 누가 어리석지 않은 자 있으리요. 쇳덩이가 대장간 불구덩이에서 명검이 되어 나오듯, 어리석음을 굴리면 지혜가 되고 천함을 굴리면 귀함이 되며, 악을 굴리면 선함이 되니 마음먹기 달린 것이요. 나를 따라 우리 스승님께 가서 더 큰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십시다.」
그 스님은 바로 목련존자였으며, 연화색과 남자들이 함께 따라가 목련존자의 스승인 부처님께 모두 귀의하여 비구․비구니가 되었고, 연화색은 수행을 잘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되고 여인이지만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도인(道人)이 되었다.
◑ 이야기 일곱
강원도 골짜기! 주막집 아낙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김서방이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마누라가 집어 주는 몇 푼으로 노름도 하고, 계집질도 하며, 놀고먹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팔자라고 뻐기고 다녔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에 나오는 날부터 늙고 병들고 죽어 가기 마련. 팔자 좋던 김서방도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게 되는데, 네 죄를 알겠느냐는 염라대왕의 물음에 대답이 걸작이었다.
「대왕님! 저는 세상에 살면서 죄라는 죄자도 구경을 못했습니다. 나약한 마누라를 다른 사내놈들이 찝적거리면 도와주고, 마누라 뒷바라지 하며 마누라가 주는 돈도 배고픈 친구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남으면, 부처님께 불전도 올리고 착한 일만 골라서 하다 왔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호통치며 말했다.
「이놈아!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뭔지나 아느냐? 살인자도 도둑질한 자도 그 과보가 다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게으른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하느니라! 일직사자! 월직사자들아! 저놈이 놀고먹는 죄가 어떤 죄인지 깨닫게 하라!」
사자들에게 네 다리가 들리어 어딘가에 던져진 김서방은 한참 만에 눈을 뜨고 보니, 다리 아래 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럴 수가!」
자신도 강아지 몸뚱이로 어미개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며칠이 지나자 주인 없는 들개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비루먹은 몇 마리 강아지만 남게 되었다.
다리 아래 떨어지는 달빛 속에 김서방 아니, 김강아지는 참으로 기가 막혀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웬 늙은 거렁뱅이가 다리 밑으로 기어들더니 작대기를 휘둘러 강아지들을 쫓아내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화가 난 김서방(강아지) 아무리 말을 해도 개소리밖에 안 나오니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런데 늙은 거지가 「야! 요놈 쓸 만하겠다」며 가까이 부르더니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쳐 주는데, 김서방 아니 김강아지로선 식은 죽 먹기였다.
비록 몸뚱이는 강아지지만 생각은 사람이니, 기막힌 재주꾼이 되었다. 늙은 거지와 합작으로 시장판에 나가서 재주부리고 벌어들이는 돈이 수월찮았으니, 그때부터 김서방, 아니 김강아지는 호의호식하게 된다. 맛있는 고기덩이에 따뜻한 잠자리, 거기다 거렁뱅이의 총애를 받으며 사는 삶이 전생 인간으로 살 때보다 못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배가 부르니 다른 생각이 자꾸 나게 된다. 하루는 다리 밑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리 위를 기막히게 예쁜 암강아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김강아지는 암강아지의 뒤를 쫓아 따라간다. 따라가면서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나는 사람인데, 암캐 뒤를 따라가다니…….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도망가는 암캐의 뒤를 죽어라고 쫓아간다.
암캐가 어느 집 개구멍으로 들어가자 역시 따라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온몸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니, 집안에는 암캐의 신랑인, 세파트와 불독이 두 마리나 있을 줄을 김강아지가 알 리 있었겠는가!
절뚝이며 돌아오는 김강아지, 아니 김서방은 기가 막혔다. 비록 몸뚱이는 개새끼이지만 생각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 무슨 추하고 해괴한 꼴인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결국 김강아지는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만다.
또 염라대왕 앞에 올 수밖에. 그에게 염라대왕이 호통치며 말한다.
「이놈이 혼날 짓은 골라서 하는 놈이구나. 일 안하고 놀고먹는 죄, 다음으로 무서운 죄가 자살하는 죄인 줄을 몰랐던가. 이놈에게 더 무서운 벌을 내려라!」
또 사자들에 의해 던져진 그가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마굿간이었다.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네 개 달린 망아지였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좋다, 강아지 노릇도 했는데 망아지 노릇 못 하겠는가.」
역시 몸은 망아지지만 생각은 인간이니 얼마나 영특하겠는가. 또 주인의 사랑을 얻게 되고, 장군인 주인이 싸움터에 공을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하니, 그 대접이야 말할 수 없었다.
「뭐, 인간살이보다 나으면 나았지, 말(馬)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구나!」
그런데 김서방으로 살던 생각이 차츰 흐려지고, 진짜 말로 변해 가는 자신이 문득문득 두렵기 시작했다.
인간사뿐만 아니라, 말이 사는 세상도 똑같이 양지와 음지가 있었으니, 싸움터에 나갔던 장군이 전사를 하게 되고, 그 집안은 몰락하여 풍지박산이 되고 만다.
이 김말(김서방)은 못 사는 장군의 친척 집으로 끌려가서 거친 음식에다 죽을 지경까지 일을 하니, 정말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도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고개를 올라가는데, 도저히 힘이 없어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주인은 안 올라간다고 채찍으로 후려치니 김말, 아니 김서방은 제정신이 들며,
「오냐 때려라! 맞아 죽으면 이 고생도 끝이 아니겠는가, 맞아 죽으면 자살도 아니니 이보다 더한 벌이야 받겠는가. 때려라 이 주인놈아! 어서 때려라」
하며 대들었다.
주인은 진짜 화가 나서 말의 머리를 내려치니 김말(김서방)은 또 죽고 만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염라대왕 앞에 올 수밖에.
「사자들아! 저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대왕을 기만하려 하였으니, 더 뜨거운 맛을 보여 주어라!」
말 한 마디 못하고 어딘가에 던져진 김서방은 컴컴하고 좁은 굴을 정신없이 헤쳐 나와 보니 시원한 풀밭이었다. 휘휘 둘러보다 옆을 보니, 징그러운 큰 구렁이가 있지 아니한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고 도망가 다시 뒤를 보니, 그래도 쫓아온다.
정신이 김서방으로 돌아온 김뱀은 이놈의 뱀을 가만 두지 않겠다며 주위를 둘러보다, 그만 까무러치고 만다.
결국 그 뱀이 자신의 몸뚱이였던 것이다. 이제는 김서방이었던 생각도 가물가물, 그저 뱀의 본능에 개구리를 잡아먹고 두더지를 잡아먹는 징그러운 구렁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가 들린다. 아! 내 김서방 시절에 절에서 들었던 범종 소리다.
소리따라 기어가니 목탁 소리, 법고 소리, 염불 소리가 악심을 놓게 하고, 뉘우침의 눈물을 주게 하니, 김뱀(김서방)은 그 소리를 잊지 않으려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살생하는 대신 아침 이슬을 따먹고, 절에서 나오는 저녁 연기내음을 맡으며, 염불 소리, 독경 소리를 듣고 살다가 제 수명을 마치게 된다.
김서방은 다시 좋은 과보를 얻어 부지런히 사는 중생이 되었다하니 놀고먹는 무위도식의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업인가를 알게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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