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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민영환 대감과 혈죽(血竹)

MCwoo 2016. 6. 24. 00:57


1905년 11월 17일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니

이로써 대한의 외교권은 박탈당하고 일본의 아래에 놓인다.

조약의 무효와 매국노의 규탄을 부르짖는 상소문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소운동에 적극 개입했던 민영환은

울분을 머금은채 이천만 동포와 해외 공관장,

그리고 고종 황제께 드리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한다.

때는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선생의 나이 45세였다.


이후 선생의 순국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선생의 뒤를 따라 조병세, 홍만식 등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한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킨다.

그 외에도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개별적인 거사도 일어난다.


이러한 시국에 선생을 부인 박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겨 무료한 세월을 보낸다.

이듬해 7월 어느날, 부인은 선생의 유품을 보관해 두었던 방에

환기라도 시킬까 하고 문을 여는데,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다.


남편이 죽을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무셔둔 마루방의 틈새에서

난데없이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는게 아닌가!



이 청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한다.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천명씩 선생의 집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은

"대나무가 선생이 순절할때 흘린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

하여 '혈죽'이라 부르며 용기를 갖기 시작한다.

4줄기 9가지에서 45장의 잎이 피어난 대나무는

선생이 순국할 당시 나이와 같아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른바 '민영환의 혈죽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대한매일신보)



'민충정공혈죽'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씨는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하여

자줏빛 보자기로 싸고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상자 속에 넣어 보관해오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명망하리라.

삶을 원하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 살아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를 갚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황천에서 동포들을 돕고자 하니, 우리 동포 형제들이여,

천 만 배 기운을 떨쳐 힘써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협력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아! 슬파도다.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별하노라.

1905년 11월 4일 민영환



[출처 : http://cafe.naver.com/valro]